움직이는 소나무 시즌4가 시작되었습니다!!!


시즌1"길은 도로가 아니다" - 길에 대한 녹색교통의 생각

소나무대장
2021-05-18
조회수 247

길은 도로가 아니다.


* 이 글은 녹색교통운동이 20년 전 소식지에 개제한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도시는 선이다. 차선을 지키자 !”

- 1966년 서울도시기본계획 당시 서울시 표어


“번개들마저 쫓겨난 거리

밤의 뜨거운 탯줄은 이미 끊어졌다.

시궁창들이 모여 도시 계획을 꿈꾼다.

찌든 고장 굶는 마을 골짜기 골짜기의 아우성들이

질주하는 자동차에 갈려

뭉개진다 아스팔트가 신음하며 갈라 터진다.“

- 최민, 「밤의 서울」, 『창작과 비평』1971년 가을호


“인간은 목적을 갖고 있고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기 때문에 직선으로 걷는다. 그는 어떤 특정한 장소에 가기로 작정한 다음 곧바로 그리로 간다. ……구부러진 길은 짐마차 끄는 노새의 길이고, 곧바른 길은 인간의 길이다..”

- 르꼬르비지에, 『내일의 도시』 11, 18면


“거리에 비가 오듯 내 마음에도 비가 내리네.”

- 폴 베를레느(Paul Verlaine) 


도로는 길이 아니다. 

공학 교과서나 교통 법규, 또는 시의 홍보용 소책자에 나타나는 ‘길’은 어디까지나 소통을 위해 경계지어진 공간, 즉 도로일 뿐입니다. 도로는 말하자면 전화줄이나 운하같이 움직임을 담는 개념이어서, 지도에서는 선으로 표시되고, '도로율', '포장률', '단위 시간 내 이동하는 사람과 자동차의 양' 같은 추상적인 기준으로 규정되고 있을 뿐이지요. 이런 개념에서 보면 고속도로나 마을의 골목길이나 용량만 다를 뿐 도로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도시의 근간을 이루고 또 형성되는데 있어 도로가 기반이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몸의 여러 조직을 연결하는 핏줄처럼 도로는 복잡하게 갈라진 도시의 여러 활동들을 엮고 또 연결시킵니다. 도시의 생성과 변화 자체가 도로에 의해 크게 좌지우지 되는 이유는 교통이 모이는 도로의 기준점에 따라 마을이 생겨나고 점차 확장해 도시가 되며, 또 그 도시가 커져 가는 과정에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도시가 형성된 뒤에는 도로가 단순한 소통로를 넘어선 기능과 의미를 갖게 됩니다. 단순히 두 지점을 연결하는 기능으로서만이 아니라, 도시라는 독특한 형태의 공동체성을 갖는 장소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는 도시는 사람과 자동차가 이동하는 것으로만 한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길과 그 주위를 에워싸는 모든 건물과 표지, 나무, 그리고 그 위와 옆에서 일어나는 온갖 활동과 사건, 사람이 구체적인 도시의 길을 이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생의 많은 부분을 길 위에서, 또 길을 경험하면서 보내지만, 이렇게 지내는 시간 전체가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움직이는 단 한가지 목적으로만 이루어진다고 볼 수는 없지요.

도시에서 길이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생활의 직접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길에서 도시를 구성하는 모든것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또 공동체가 서로 만나며 동시에 나뉘어집니다. 이런 뜻에서 길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생활의 일부를 길에 투영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이유로 길이 도시 생활의 추하고 아름다운 면, 이기적이고 이타적인 면, 탐욕스럽고 고귀한 면을 모두 표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길을 통해서 우리 도시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누구를 위하여 도로가 있는가

이렇듯 길이라는 것이 도시라는 공동체의 본연의 모습과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차가 이동하는 도로로서만 생각되고 다루어져 온 것이 현대 도시 계획 어두운 면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머무르게 하는 일 대신에, 되도록 서로 엇갈리지 않고 빨리 지나치도록 하는 일에 최고의 기술과 지혜가 동원되고 있는 셈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산업화, 고속화, 분업화로 특징지어지는 현대 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복잡하고 바쁜시대에 길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비생산적인 일일 뿐이지요. 도시를 움직이는 자본이나 행정의 입장에서는 물론이고, 도시를 계획하는 전문가들에게도 길을 차가 우선인 도로로 바꾸는 일이 주요 목표로 여겨져 왔던 것입니다. 사실 현대 도시 계획의 선구자들은 대개가 길의 종말을 굳게 믿었고, 그 후배들은 이 예언이 하루빨리 이루어지도록 하는 과업에 골몰해 왔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많은 도시가 이런 가치관에 따라 ‘고속화’되었고, 근대화의 대열에 뒤늦게나마 참가한 우리의 도시들 역시 여전히 이런 가치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도로가 누구를 위해, 왜 존재하는지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지적되어야 할 것이 목적과 수단의 전환입니다. 교통 본연의 목적이 멈추는 데에 있는 것이지 움직이는 과정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 망각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일은 수단입니다. 결국 장소에 도달하기 위해 움직임이 필요한 것이지 장소 자체가 움직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만큼, 좋은 교통 체제는 오히려 교통이 필요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이리저리 움직여야 할 필요가 없도록 하는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도로가 지배하는 도시에서는 도시의 현실이 달리는 열차 창 밖으로 보여지는 풍경처럼 피상적으로 경험되기 쉽다는 점입니다. 대상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이해하기위해서는 우선 멈춰서 보고, 만져 보고,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자동차 교통이 주가 되는 도로 계획은 특히 불평등한 계획이 되기 쉽습니다. 몰론 도시의 경제와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한 계층일수록 시간이 중요하고, 따라서 자동차 교통에 의존해야 할 필요성이 높아질 것은 사실이지요. 그러나, 앞서 얘기한 대로 도시의 길이 한 집단의 전유물일 수 없는 ‘모두’의 것이라면 마땅히 걷고 머무르는 요구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바퀴 달린 도구를 이용해서 빨리 움직이더라도 두 발이 땅에 닿는 상태가 마지막에 도달하는 상태라는 점과 태어날 때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것은 바퀴가 아니라 두 발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도로로만 변해 가는 우리 도시의 ‘길’을 다시 길로 회복시키는 것이 요구됩니다. 오직 길의 회복을 통해 도시를 모두에게 돌려주어 참된 공통체로 만드는 인간화, 민주화의 작업이기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한국 도시에서의 길

지난 2000년대 후반까지, 한국의 도시는 그 전 몇 세기에 견줄 만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평면적으로 확대되었을 뿐 아니라 위로도 높아졌고, 땅 밑으로도 터널을 뚫어서 사람과 차가 통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는 서울, 부산 같은 대도시에서 제일 눈에 띄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중소 도시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존 도시는 개조되었고 여기저기 새 도시들도 여럿 생겨났습니다.


도시 환경에서 특히 변모한 것이 길이다.

올 해에 나온 지도가 그 다음 해에는 쓸 데가 없을 정도로 길은 파헤쳐졌고, 펴졌고, 넓혀졌고, 새로 건설되었습니다. 대통령과 시장이 ‘길’대통령, ‘길’시장으로 불리게 될 만큼 시정의 큰 비중이 도시 계획에 쏟아졌으며, 도시 계획의 주된 사업이 도로를 만들 선을 긋고 만드는 데 집중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비교적 ‘가로’의 문화에 생소하였던 우리 나라의 전통적 도시에 큰 변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길마다 고유의 이름을 붙이고, 그 길을 기반으로 집의 위치를 찾는 서구의 도시 전통과는 달리, 길보다는 동네를 우선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우리의 인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붙어있는 두 집의 번지가 떨어지기도 하고, 특정한 집을 가리킬 때에도 '무슨 가(街) 몇 번지'라고 하기보다는 ‘갯골 버드나무 옆 집’하는 식으로 불렸던 것이지요. 그러나 도로 건설 붐과 맞물려 웬만한 길이면 전부 이름을 갖게 되었고, 우리의 의식 속에서도 도로는 동네가 갖는 수준 만큼의 위치를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도로의 양적 확대와 의식의 부상과 더불어, 도로의 전문화가 이루어진 것도 생각해볼 만한 일입니다. 고속도로, 고가도로, 지하도 등과 같은 물리적인 구분과 더불어 업무지역, 생업지역, 주택지역 등이 기능적으로나 물리적으로 확연한 대조를 보이면서 등장하게 된 것도 최초의 일입니다.

도로 건설의 범국가적인 노력이 국토의 거리를 좁히고 도시의 교통을 개선하는 데 큰 기여를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여에도 불구하고 도시 ‘환경’을 사람이 머무는 길로 만드는 일에는 별로 성공을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우선, 전국의 도시들이 천편일률적인 모습을 갖게 된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워낙 작은 나라라 향토적인 특색이 그리 두드러진 편은 아니었지만, 도시의 길을 도로라는 개념으로만 접근하는 사고방식과, 이렇게 만들어진 도로를 통해 전파되는 ‘중앙’문화의 압박 때문에 그나마 유지되던 향토색마저 흐려지고 말았습니다. 전주, 광주, 대전 심지어는 천안, 원주같이 작은 도시도 특색은 없어지고 서울의 축소판으로 된 형편이지요. 오직 충무, 여수같이 자연의 경관이 강력한 곳이나, 개발이 덜 된 도시에서나 지방의 특색과 전통이 도시상에 남아 있을 뿐입니다.

또 하나는 도시가 잘 통합된 유기체로서 작용하기 위해 요구되는 공간적 연속성이 도로의 망에 따른 조직 때문에 파괴되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특히 토지 구획 정리 사업으로 만들어진 도시 변두리의 주택지에 자주 나타나는 문제인데, 각 사업 단위가 중심이되어 주위에 대한 고려 없이 계획되어 이웃한 주거지끼리도 궤가 안 맞고, 지역 전체는 서로 괴리된 채 우발적으로 모여 이룬 모자이크 형태가 되고 만 것이지요. 이런 공간적이 괴리는 도로와 이에 근접한 가구 사이에도 나타납니다. 마치 봉합이 제대로 안 된 수술 자국이나, 논을 가르고 지나는 고속도로처럼 주위의 건물이 규모에 따른 조화를 못 이루고 서로 부적합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것이 도시의 공간적 질서나 시민 생활의 편익에 보탬이 안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도로에서 다시 길로

우리 도시의 길을 구성하는 원리 가운데 하나는 위계 질서를 공간화, 형상화시키는 일인 것 같습니다. 주어진 건물이 어떤 위치에 속한 집단을 수용하느냐에 따라 길속에서의 그 건물의 위치가 결정됩니다. 이러한 원칙은 관공서가 집단적으로 위치해 있는 공공기관 밀집지역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서울 광화문에서 시청까지의 길이 대표적인 예로, 규모는 작지만 같은 양식이 지방도시에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도로는 방향성을 가진 축으로 작용하고, 그 정점에는 최고 통수자가(미국은 국회가) 자리잡습니다. 다른 기관들은 그 ‘아래’ 높낮이 순서대로 도열하고, 그 지역이 끝나는 곳에 정부의 문화, 예술 기관들이 위치하게 됩니다. ‘우리 시대 최고’의 건축 문화가 이 거리를 장식하기 위하여 동원되고, 현수막과 아치가 장식을 마무리합니다. 그 정연함이나 점잖음은 옛날 조례를 방불케할 정도이죠.

특히 광활한 도로가 그 중심축을 이루지만 이 도로는 기능보다는 의례의 의미가 더 큽니다. 사열대를 지나는 대열처럼 사람들은 중심축의 정점에 경의를 표하고는 곧 지나가도록 고안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보행자는 최소한의 시설로만 지원을 받고, 일반인들을 끌어들여 머물게 할 장소들은 관공서를 비켜선 뒷골목에 위치하게 됩니다. 축을 따라서 뿐 아니라 축에 엇갈려서도 사회 공간의 높낮이와 안팎이 구분되는 것이지요. 어느 도시든 대개 관공서와 가까운, 그러나 교통 조건이 더 좋은 곳에 큰 기업들과 금융 기관들이 들어서 업무지구를 형성하기 마련입니다. 도시의 경제를 움직이는 곳인지라, 도시의 현대화는 이곳부터 시작되는 것이 통례입니다. 첨단기술이 도입되어 사옥들이 신축되고, 주차장이 확보되며, 도로가 확장됩니다. 이 과정속에서 영세한 토지는 합병되거나 잠식되고, 애초의 길 대신 지하도와 백화점 속의 통로가 생겨나게 됩니다.

길과 도시 환경에 대한 기여도로 말하자면 한국의 업무지구는 매우 인색합니다. 시민들에게서 가져간 것이 비해 내놓은 것이 별로 없다는 뜻이지요. 학교부지, 주택, 골목, 가게들의 자리 위에 서 있으면서도 한치의 땅이라도 시민의 편리와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지를 않습니다. 모두가 자기 대지를 독립된 제국으로 여기듯이(사실 건축법이 그런 것을 조장하기도 합니다.) 길을 무시한 채 높은 빌딩들이 들어서 길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깨뜨려버립니다. 게다가 전용 주차장에 드나드는 차 때문에 보행도로 역시 군데군데서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는 기왕에 연결되어 있던 지하 보도까지 관리 문제로 끊는 것이 현실이지요. 부담없이 들를 수 있는 뒷골목도 고급 호텔의 라운지나 아케이드가 들어섭니다. 해당 지구의 발전상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현장을 목격하는 셈이라는 생각이 드는 모습입이다.


시급한 길의 인간화

우리 도시의 길은 안전하지도 편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아름답지도 공평하지도 않습니다. 길의 모습을 통해 드러난 우리 사회는 무질서하고 이기적이며, 권위주의를 신봉하면서 탐욕스럽고 동시에 과시를 좋아합니다. 길이 도시의 핵심적인 기관임에는 틀림없지만, 우리의 경우는 '조화'를 목적으로 길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도로 건설에 따른 부산물로 우발적으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도시 계획은 도시 전체를 다룬다는 종합성과 공학의 합리성을 앞세우면서 길을 도시 계획도에 그려지는 두 개의 평행선으로만 취급합니다. 이 선이 바로 개개인의 토지 안에 이루어지는 건축 행위를 구제하는 기준선이 되는 것이지만, ‘선’을 그음으로써 파괴되는, 또 선에 걸쳐져서 파생되는 문제는 민원의 대상으로서, 혹은 행정 절차상의 사항으로서만 보여지는 것입니다.

반면에 도로의 뼈에 ‘살’을 붙여 길을 만드는 일을 담당해야 할 건축 역시 반(反)길의 사고 방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고급스럽고 내밀한 예술품을 만들어내는 데에만 몰두해 온 나머지, 인류, 미, 공간, 전통 등의 초월적, 세계적 문제에는 익숙하지만 국지적, 구상적 현실 세계는 오히려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도시나 길은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막는 부담으로서만 느껴질 뿐이지요. 이런 개인주의적이고 폐쇄적인 사고방식에 뿌리를 둔 엘리트 건축이 우리 도시의 길을 풍부하게 만드는 일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론 실제 우리의 길을 형성하는데 동원되는 것은 엘리트 건축이 아니라 대중적인 건축입니다. 엘리트 건축가의 에너지는 송두리째 기업과 ‘사회 지도층’의 집과 사무소를 창조하는 데로 투입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길을 만들기에는 건축은 너무나도 상업주의적입니다. 도시 계획이나 건축은 수단이자 방법일 뿐입니다. 도시의 길이 한낫 소통로로 왜소화되는 데에는 환경을 다루는 것이 직업인 사람들의 책임도 크지만, 우리 모두의 책임도 크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길은 도시의 부분입니다. 그리고 도시의 경관은 사회의 질서와 문화의 반영일 뿐이지요. 구체적 현실의 부분적 개선 속에서 전체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우리 도시의 길을 풍부하게, 안전하게, 인간답게 만드는 일은 결코 의미없는 일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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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들의 움직임이 이루어낸 탄소 감축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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