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행권 활동보행권 - 길은 도로가 아니다.

길은 도로가 아니다.


  “도시는 선이다. 차선을 지키자 !”

                 (서울시 표어)


“번개들마저 쫓겨난 거리

밤의 뜨거운 탯줄은 이미 끊어졌다.

시궁창들이 모여 도시 계획을 꿈꾼다.

찌든 고장 굶는 마을 골짜기 골짜기의 아우성들이

질주하는 자동차에 갈려

뭉개진다 아스팔트가 신음하며 갈라 터진다.“

                  (최민, 「밤의 서울」, 『창작과 비평』1971년 가을호)


“인간은 목적을 갖고 있고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기 때문에 직선으로 걷는다. 그는 어떤 특정한 장소에 가기로 작정한 다음 곧바로 그리로 간다. ……구부러진 길은 짐마차 끄는 노새의 길이고, 곧바른 길은 인간의 길이다..”

                   (르꼬르비지에, 『내일의 도시』 11, 18면)


“거리에 비가 오듯 내 마음에도 비가 내리네.”

                   (베를레느)


도로는 길이 아니다.

  공학 교과서나 교통 법규, 또는 시의 홍보용 소책자에 나타나는 ‘길’은 어디까지나 소통을 위해 구획된 공간, 즉 도로이다. 도로는 말하자면 전화줄이나 운하같이 움직임을 담는 존재여서, 지도에서 선으로 표시되고, 도로율, 포장률, 단위 시간에 흘려보낼 수 있는 사람과 장도차의 양 같은 추상적인 자로 가늠된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고속도로나 도시의 뒷골목이나 용량이 다를 뿐 도로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도로가 도시의 근간을 이루고 또 도시의 형성이 도로에 뿌리박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몸의 여러 조직을 연결하는 핏줄처럼 도로는 복잡하게 분화된 도시의 여러 활동 등을 엮고 연결시킨다. 도시의 생성과 변화 자체가 도로에 의해 크게 지배받는 것은, 교통이 모이는 도로의 결정점에 마을이 생겨나고 이들이 자라 도시가 되며, 도시를 따라 도시가 커져 가는 과정에서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일단 형성된 뒤 도시 안의 도로는 단순한 소통로를 넘어선 기능과 의미를 가진다. 두 지점을 연결하는 도구로서만이 아니라 도시라는 특유한 형태의 공동생활을 담고 표현하며 조절하는 3차원의 장소로 등장하는 것이다. 시가지라는 말이 나타내듯 도로가 길이 되는 데에서 도시가 집들의 집합이 아닌 공동체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고 기억하는 도시의 길은 신발과 자동차 바퀴가 얹혀지는 지표면만이 아니다. 지표면뿐 아니라 그 주위를 에워싸는 모든 건물, 표지, 나무, 그리고 그 위와 옆에서 일어나는 온갖 활동과 사건이 구체적인 도시의 길을 이룬다. 그것은 양 끝이 끝없이 연장된 선이 아니고 한정지울 수 있는 장소이며 3차원적인 공간인 것이다. 우리는 일생의 많은 부분을 길 속에서, 또 길을 경험하면서 보내지만 이렇게 지내는 시간 전체가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움직이는 단 한가지 목적에만 바쳐지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도시의 길은 모여 사는 생활의 직접적인 표현이다. 길에서 도시를 구성하는 개체와 이들이 모여 이루는 공동체가 만나며 나뉘어진다. 길의 외벽을 따라 개인과 공중, 하나하나와 모두, 안과 밖이 구분된다. 길 속에서 나옴으로써 개인은 공중이 되고, 길에서 들어감으로써 공중은 다시 개인이 된다. 길이 ‘모두’의 의미를 가진 것은 언어에도 투사되어 있다. ‘길을 막고 물어보라’는 표현이나, ‘거리의 여자’라는 표현도 어느 누구에 속하지 않는, 모두라는 뜻을 가진다. 구호를 외치며 길로 뛰쳐나가는 데모대나, 높은 분의 행차에 동원되어 길에 도열한 시민이나, 그 뒤의 정치적인 발상은 다르겠지만 길을 차지함으로써 ‘부분’이 ‘모두’가 되는 마술에 참가하고 있다는 점은 같다 할 것이다.

  이런 뜻에서 길은 관중과 배우가 서로 역을 바꾸며 진행하는 연극이 펼쳐지는 곳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길은 동시에 객석이며 무대이다. 우리는 관객으로서 길 속에서 그 연변에서 영위되는 삶의 모습을 보고, 또한 동시에 배우로서-원하든 원하지 않든간에-우리 생활의 일부를 길에 투영한다. 길이 도시 생활의 추하고 아름다운 면, 이기적이고 이타적인 면, 탐욕스럽고 고귀한 면을 모두 구상화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이런 까닭이다. 길을 통해서 우리 도시의 참모습을 보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구를 위하여 도로가 있는가

  이렇듯 길이 도시라는 공동체의 본연의 모습과 원천적으로 결합돼 있는데도 불구하고 도로로서만 생각되고 다루어져 온 것이 우리 시대 도시 계획의 풍조요, 그렇게 하여 개조된 도시의 모습이다. 사람과 사람을 이웃으로 모으고 머무르게 하는 일 대신에 되도록 서로 엇갈리지 않고 빨리 지나치게 하는 일에 우리 시대 최고의 기술과 지혜가 동원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산업화, 고속화, 분업화로 특징지어지는 우리 시대에서 피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복잡하고 바쁜 현대에, 기간이 금인 오늘날에, 길에서 우물거린다는 것은 비생산적인 일일 뿐 아니라, 전근대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도시를 움직이는 자본이나 행정의 입장에서는 분명 그러할 뿐 아니라, 도시를 개조하는 임무를 맡은 계획가에게도 길을 도로로 바꾸는 일이 주요 목표로 여겨져 왔던 것이다. 사실 현대 도시 계획의 선구자들은 대개가 길의 종말을 굳게 믿었고, 그 후배들은 이 예언이 하루빨리 이루어지도록 하는 과업에 골몰해 왔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도시가 이런 가치관에서 수술을 받아 ‘고속화’되었고, 근대화의 대열에 뒤늦게나마 참가한 우리의 도시들 역시 이런 수술을 받는 중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맞고 대단히 합리적인 추세 속에도 큰 문제들이 있다. 다시금 누구를 위해 왜 도로가 있는가를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지적되여야 할 것이 목적과 수단의 전도이다. 교통 본연의 목적이, 멈추는 데에 있지 움직이는 과정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 망각되고 있다. 움직이는 일은 수단이다. 결국 장소에 도달하기 위해 움직임이 필요한 것이지 장소가 움직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만큼, 좋은 교통 체제는 오히려 교통이 필요 없게 만드는 즉, 이리저리 움직여야 할 필요가 없도록 하는 것이라는 단순한 진리가 잊혀지고 있다.

  또 하나의 도로가 지배하는 도시에서는 도시의 현실이 달리는 열차 창 밖에 전개되는 풍경마냥 흐릿하게, 그리고 피상적으로 경험되기 쉽다는 점이다. 대상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이해하며 대처하기 위해서는 우선 멈춰서 보고, 만져 보고 살펴보는 일이 요구된다는 사실은 시장 보는 아낙네나 여인 사이에만 통용되는 조건이 아닐 것이다.

  또한 도로 위주의 계획은, 특히 그것이 자동차 교통을 전제로 하고 있을 때에는 불평등한 계획이 되기 쉽다는 점이다. 몰론 도시의 경제와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한 계층일수록 시간이 중요하고, 따라서 자동차 교통에 의존해야 할 필요성이 높아질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앞서 얘기한 대로 도시의 길이 한 집단의 전유물일 수 없는 ‘모두’의 것이라면 응당 걷고 머무르는 요구도 충족시켜야 한다. 바퀴 달린 도구를 이용해서 빨리 움직이더라도 두 발이 땅에 닿는 상태가 마지막에 도달하는 상태라는 점과 하느님이 태어날 때 모두에게 공평하게 배급한 것은 바퀴가 아니라 두 발이라는 점이 기억되어야 한다.

  도로로 변해 가는 우리 도시의 ‘길’을 다시 길로 회복시키는 작업이 요구된다. 이 일은 관광객이 거리 풍경을 쉽게 찍게 하기 위해서나, 낭만적인 복고주의의 이유로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직 길의 회복이 도시를 모두에게 돌려주어 참된 공통체로 만드는 인간화, 민주화의 작업이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한국 도시에서의 길

  지난 2000년대 후반까지, 한국의 도시는 그 전 몇 세기에 견줄 만한 변화를 겪었다. 평면적으로 확대되었을 뿐 아니라 뒤로도 높아졌고, 땅 밑으로도 터널을 뚫려서 사람과 차가 통행하게 되었다. 이런 변화는 서울, 부산 같은 대도시에서 제일 눈에 띄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중소 도시에서도 나타난다. 기존 도시는 개조되었고 여기저기 새 도시들이 생겨났다.

  도시 환경에서 특히 변모한 것이 길이다.

  한 해에 나온 지도가 그 다음 해에는 쓸 데가 없을 정도로 길은 파헤쳐졌고, 펴졌으며 넓혀졌고 새로 건설되었다. 대통령과 시장이 ‘길’대통령, ‘길’시장으로 불리게 될 만큼 시정의 큰 비중이 도시 계획에 쏟아졌으며, 도시 계획의 주 노력이 도로선을 긋고 도로를 축조하는 데 집중되었다.

  이런 일은 비교적 ‘가로’의 문화에 생소하였던 우리 나라의 전통적 도시에 큰 변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길마다 고유의 이름을 붙이고, 길에 준해서 집의 위치를 기억하는 서구의 도시 전통과는 달리, 길보다는 동네를 우선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우리의 인식이었다. 그래서 바로 붙은 두 집의 번지가 동떨어지기도 하고, 특정한 집을 지적할 때에도 무슨 가(街) 몇 번지 하기보다는 ‘갯골 버드나무 옆 집’하는 식으로 불렸던 것이다. 그러나 도로 건설 붐과 아울러 웬만한 길이면 이름을 갖게 되었고, 우리의 의식 속에서도 도로는 동네에 준할 만큼의 위치를 갖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도로의 양적 확대와 의식 속에서의 부상과 더불어, 도로의 전문화가 이루어진 것도 특기할 일이다. 고속도로, 고가도로, 지하도 등이 물리적인 구분과 더불어 관아가, 업무가, 생업가, 주택가 등이 기능적으로나 물리적으로 확연한 대조를 보이면서 등장하게 된 것도 최초의 일이다.

  도로 건설에 대한 범국가적인 노력이 국토의 거리를 좁히고 도시의 교통을 개선하는 데 큰 기여를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여에도 불구하고 도시 ‘환경’을 보다 더 인간적이고 민주적으로 만드는 일에는 별로 성공을 하지 못한 것 같다.

  우선, 전국의 도시들이 천편일률적인 모습을 갖게 된 점을 들 수 있겠다. 워낙 조그만 나라라 향토적인 특색이 그리 두드러진 편은 아니었지만, 도시의 길을 도로라는 기술적 문제로만 접근하는 사고방식과, 이렇게 만들어진 도로를 통해 전파되는 ‘중앙’문화의 압박 때문에 그나마 유지되던 향토색마저 흐려지고 말았다. 전주, 광주, 대전 심지어는 천안, 원주같이 작은 도시도 도시적 특색은 없어지고 서울의 축소판으로 된 형편이다. 오직 충무, 여수같이 자연의 경관이 강력한 곳이나, 개발이 덜 된 도시에서나 지방의 특색과 전통이 도시상에 남아 있을 뿐이다.

  또 하나는 도시가 잘 통합된 유기체로서 작용하기 위해 요구되는 공간적 연속성이 도로의 망상 조직 때문에 파괴되는 경우이다. 이것은 특히 토지 구획 정리 사업으로 이룩된 도시 변두리의 주택지에 자주 나타나는 문제인데, 각 사업 단위가 소유주인 양, 주위에 대한 별 고려 없이 계획하는 경향 때문에 이웃한 주거지끼리도 궤가 안 맞고, 지역 전체는 서로 괴리된 쪼박지들이 우발적으로 모여 이룬 모자이크가 되고 만다. 이런 공간적이 괴리는 도로와 이에 연접된 가구 사이에도 나타난다. 마치 봉합이 제대로 안 된 수술 자국이나, 논을 가르고 지나는 고속도로처럼 오시와 주위의 건물이 규모에 따른 조화를 못 이루고 서로 부적합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것이 도시의 공간적 질서나 시민 생활의 편익에 보탬이 안 되는 일임은 물론이다.

  

  도로에서 다시 길로

  우리 도시의 길을 구성하는 원리 가운데 하나는 위계 질서를 공간화, 형상화시키는 일인 것 가다. 주어진 건물이 어떤 위치에 속한 집단을 수용하느냐에 따라 길속에서의 그 건물의 위치가 결정된다. 이러한 원칙은 관공서가 집단적으로 위치해 있는 관아가에서 철저히 지켜진다.

  서울의 광화문에서 시청까지의 길이 대표적인 예지만, 규모는 작아도 같은 양식이 지방도시에서도 반복된다. 이런 경우 도로는 방향성을 가진 축으로 작용하고, 그 정점에는 최고 통수자가(미국은 국회가) 자리잡는다. 뭇 기관들은 그 ‘아래’ 높낮이 순서대로 공손히 도열하며, 관아가 끝나는 곳에 정부의 문화, 예술 기관들이 위치한다. ‘우리 시대 최고’의 건축 문화가 이 거리를 장식하기 위하여 동원되고, 현수막과 아치가 장식을 마무리한다. 그 정연함이나 점잖음은 옛날 조례를 방불케한다.

  특히 광활한 도로가 관아가의 중심축을 이루지만 이 도로는 기능보다는 의례의 의미가 더 크다. 사열대를 지나는 대열처럼 사람들은 중심축의 정점에 경의를 표하고는 곧 지나버리도록 고안되어 있다. 따라서 보행자는 최소한의 시설로만 지원을 받고, 일반인들을 끌어들여 머물게 할 장소들은 관아가를 비켜선 뒷골목에 챙겨진다. 축을 따라서뿐 아니라 축에 엇갈려서도 사회 공간의 높낮이와 안팎이 구분되는 것이다.

  어느 도시든 대개 관아가와 가까운, 그러나 교통 조건이 더 좋은 곳에 큰 기업들과 금융 기관들이 들어서 업무가를 형성하기 마련이다. 도시의 경제가 요리되는 곳이 이곳인지라, 도시의 현대화는 이곳부터 시작되는 것이 통례이다. 첨단의 기술이 도입되어 사옥들이 신축되고, 주차장이 확보되며, 도로가 확장된다. 이 과정속에서 영세한 토지는 합병되거나 잠식되고, 애초의 길 대신 지하도와 백화점 속의 통로가 생겨난다.

  길과 도시 환경에 대한 기여도로 말하자면 한국의 업무가는 스쿠리지이다. 시민들에게서 가져간 것이 비해 내놓은 것이 별로 없다. 학교부지, 주택, 골목, 가게들의 자리 위에 서 있으면서도 한치의 땅이라도 시민의 편리와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지를 않는다.

  모두가 자기 대지를 독립된 왕국으로 여기는지 (사실 건축법이 그런 것을 조장하기도 한다.) 길을 무시한 채 빌딩들이 들어서 길의 통일성과 연속성이 깨져 버린다. 게다가 전용 주차장에 드나드는 차 때문에 보도 역시 군데군데서 끊어질 수밖에 없다.

  심지어는 기왕에 연결되어 있던 지하 보도까지 관리 문제로 끊는 판이다. 부담없이 들릴 수 있는 뒷골목의 목로집 대신에 옷차림과 지갑의 무게가 신경써져야 할 고급 호텔의 라운지나 아케이드가 들어선다. 해당 지구의 발전상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현장을 목격하는 셈이다.


시급한 길의 인간화

  우리 도시의 길은 안전하지도 편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아름답지도 공평치도 못하다.

  길에 구상화된 우리 사회는 무질서하고 이기적이며, 권위주의를 신봉하면서 탐욕스럽고 동시에 과시를 좋아한다. 길이 도시의 핵심적인 기관임에는 틀림없지만 우리의 경우는 조화된 목적과 의지에 의해 길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도로 건설에 따른 부산물로 우발적으로 생겨난다. 한마디로 도로 아닌 길은 사고와 행동, 그리고 분야와 제도의 공백 지대에 빠져 있다.

  도시 계획은 도시 전체를 다룬다는 종합성과 공학의 합리성을 앞세우면서 길을 도시 계획도에 그려지는 두 개의 평행선으로만 취급한다. 이 선이 바로 개개인의 토지 안에 이루어지는 건축 행위를 구제하는 기준선이 되는 것이지만, ‘선’을 그음으로써 파괴되는, 또 선에 걸쳐져서 파생 괴는 문제는 민원의 대상이로서, 혹은 행정 절차상의 사항으로서만 보여지는 것이다.

  반면에 도로의 뼈에 ‘살’을 붙여 길을 만드는 일을 담당해야 할 건축 역시 반(反)길의 사고 방식에 사로잡혀 있다. 고급스럽고 내밀한 예술품을 만들어내는 데에만 골목해 온 나머지, 인류, 미, 공간, 전통 등등의 초월적, ‘범세계적’문제에는 익숙(?)하지만 국지적, 구상적 현실 세계는 오히려 손에 잡히지 않는다.

  도시나 길은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저해하는 부담으로서만 느껴질 뿐이다. 이런 개인주의적이고 폐쇄적인 사고방식에 뿌리를 둔 엘리트 건축이 우리 도시의 길을 풍부하게 만드는 일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물론 실제 우리의 길을 형성하는데 동원되는 것은 엘리트 건축이 아니라, 대중적인 건축이다. 엘리트 건축가의 에너지는 송두리째 기업과 ‘사회 지도층’의 집과 사무소를 창조하는 데로 투입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를 풍부하게 해 주는 길을 만들기에는 건축은 너무나도 상업주의 앞에 약하다.

  도시 계획이나 건축은 수단이요 방법이다. 도시의 길이 한갓 소통로로 왜소화되는 데에는 환경을 다루는 것이 직업인 사람들의 책임도 크지만, 우리 모두의 책임도 크다.

  어느 사가에 의하면 점포를 뜻하는 ‘가게’란 말은 조선조 때부터 성행된, 공로에 무단히 내지어진 ‘가가(假家)’에서 연유하는 것이라 한다. 하도 ‘가가’가 성행하여 영?정조 때부터는 광화문에서 정부청사의 대로만 빼고는 거의 모든 길이 말 탄 사람이 혼자 지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고 하니 그 폐해는 가히 상상할 만하다. 몰론 요즈음은 ‘가가’가 별로 없겠지만 모두의 것은 아무의 것도 아니니 내 것이라는 식의 생각이 아주 사라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공동체로서의 도시의 길이 요구하는 조화와 양보 대신에 아귀다툼과 경쟁이 지배하는 것이 우리의 길인 까닭이다.

  결국 도시의 길은 도시의 부분이다. 그리고 도시의 경관은 도시 사화의 질서와 도시 문화의 반영일 뿐이다. 바람직한 길은 군중이 공중(公衆)으로 정착할 때 비로서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나 문화가 허공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구체적 현실의 부분적 개선 속에서 전체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우리 도시의 길을 풍부하게, 안전하게, 인간답게 만드는 일은 결코 의미없는 일이 아닌 것이다